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5차 초공작전 (문단 편집) == 결과 == '''중국의 공산세력은 반신불수가 되었다.''' 11월 10일 루이진은 국민혁명군의 손에 떨어졌으며,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은 그 명목만 남고 국체가 파괴되면서 '''멸망했다.''' 한때 15만[* 명목상 30만]에 이르는 군세와 126개현[* 명목상 300개현]에 이르는 영토, 1,200여만에 이르는 국민을 자랑했던 중국 공산당의 영향력은 이 단 한 번의 작전으로 7만에 못 미치는 병력만을 거느린 군소규모 군벌 수준으로 떨어졌다. 반면 국민혁명군은 이후 3년간 단 한 번도 공산군의 유효한 저항을 받지 않으며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지배가 미치던 지역을 접수했다. 또한 독일식 훈련을 받은 군사의 강력한 위력을 실감한 후, 독일식 사단을 40개로, 그에 준하는 상당한 훈련을 받은 직업군인 전력을 40개로 확충하여 도합 80개 사단 80만 대군을 갖추고자 했다. 여기에 보조병과 보급역량을 합쳐 중국의 전력을 모두 최고로 끌어올린 뒤, 동아시아 최강이었던 [[일본 제국]]이 장악한 만주를 수복하고 중국을 통일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이 시작되었다. 이를 위해 10년에 걸친 군제개혁이 입안되었고, 장제스는 독일에게 물자를 대주며 군사고문단과 무기를 지속적으로 받아들였다. 1935년 국민당은 [[법폐개혁]]을 성공으로 이끌어 중화민국의 화폐를 정리하고 재정을 확충했으며, 1936년 [[제2차 양광사변]]으로 중국 대륙에서 국민당에 반발하는 마지막 거물이었던 계계군벌과 염계군벌을 멸망시켰다. 1936년 중화민국은 1912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한 이래 최대의 국민총생산(GNP)을 달성했고, 1937년 초에는 독일식 훈련과 무기배치를 끝낸 20개 사단이 공식적으로 정규군의 일부가 되었다. 국민혁명군의 힘은 이 시기 최고조에 달했고 공산당은 곧 토벌될 것 같았으며, 국민당에서 생각했던 10년의 시간이 지나고 중국군의 전력이 확충되면 만주와 요동을 포함한 중국 전체를 통일하는 것도 눈앞에 있어 보였다. 그러나 일본은 10년을 기다려 줄 생각도, 그럴 이유도 없었다. 1937년 7월 7일 새벽, [[루거우차오 사건|베이징의 노구교에서 10여 발의 총성이 일면서]] '''이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 [[중일전쟁|대재앙]]이 시작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